2008년 11월 16일 종영한 윤선주, 김태희 극본 + 김성근, 김원석 연출의 KBS 대하드라마 <대왕세종> 리뷰입니다. 전체적인 줄거리 보다는 세종의 정치 운용에 중심을 두고 썼습니다 ^-^/



       

         반대와 평화
   -드라마 <대왕세종> 리뷰-

 


다정(http://dajungspace.com)


 

<대왕세종>의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를 꼽는다면, 아마도 '반대'가 되지 않을까? 충녕대군(후일 세종/이현우-김상경)은 고려의 혁명 세력을 죽이려는 아버지 태종(김영철)에게 "백성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실체라면, 이제 더는 이 나라의 왕자로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선언한 뒤 경성으로 떠난다. 그리고 돌아온 뒤, 세자(후일 양녕대군/이준,박상민)를 제치고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 되느냐 마느냐 하는 중대한 자리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을 알고 있는 한, 타협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서로의 견해를 경청하고자 하는 한 최악이 아닌 최상의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며 자신은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걸어갈 것임을 감추지 않는다. 그리고 26년 후, 그는 훈민정음 반포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향해 "나를 설득시켜라." 면서 자신을 반대해보라고 직접 요구한다. 열세살의 충녕대군이 저자를 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민생 정치를 배워가고, 훗날 스물여덟 글자를 직접 만들어 내기까지의 수많은 사건과 역사를 한 줄로 꿰어내는 큰 축은 '반대' 이지만, 왜 이 '반대의 정치' 가 태어나게 되었는지는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만나게 되는 충녕대군의 스승, 이수(조성하)에게 있다. 그저 사서삼경에 나오는대로 착하고 어진 백성의 이미지만 그리고 있던 열세살 왕자에게, 그는 책더미를 불태우면서 "(진짜) 백성들이 누군지나 아십니까?" 라고 되묻는다. 충녕대군은 백성의 존재를 다시 생각해보기 전에도 이미 "(백성이 왕자를 지키는 게 아니라) 왕자가 백성을 지키는 거다." 라는 책임감을 느낄줄 알던 왕족이었다. 그러나 그가 저자거리에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깨뜨리게 된 '환상속의 정치' 의 결말은 책에는 나오지 않았던 '덕없고 염치 없는 백성들' 이라는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기적인 백성상(象)이야말로 앞으로의 세종의 정치 체제 구상의 시발점이 된다. 물론 세종의 평생에 걸친 '반대의 자유' 라는 신념은 어디까지나 조선 초기 군주 정치의 테두리 안에서만 실현된 것이고, 현대의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윌리엄 더글러스 판사가 역설했던 '반대의 자유' 와 같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왕세종>은 자칫하면 '반역'으로 몰리는 군주국가의 '반대'라는 것을 정치판 내부의 가장 중요한 전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반대는 아무나 하나



이는 태종 사후, 세종의 집권기가 거듭될수록 뚜렷이 나타난다. <대왕세종>에서 '반대'라는 단어와 만만찮게 자주 등장하는 대사는 바로 반대파와의 정치적 '거래'를 해야 하고, 그 논쟁에서 주도권을 가질 '패'를 쥐어야 한다는 신하들의 간언이다. 누구나 태평성대로 알고 있는 세종대의 그 어떤 관료들도 그들의 정치판이 곧 정치 '게임'판 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적 사건마다 대립하는 이들의 논쟁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기어코 쥐려는 그 '패'는 사리사욕이 아니라 백성 모두의 안위를 위한다는 정치적 명분이며, 그것을 승부수로 던지기 위해서는 합당한 사실적 근거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대마도 정벌, 4군 6진 개척, 천문의기 제작,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정책들은 국제화 시대라는 현재의 21세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외교적인 문제가 늘 얽혀 들어갔다. 그리고 강대국인 명나라와 고질적으로 조선을 약탈해가는 여진과의 관계를 동시에 놓고 보자면 4군 6진을 개척하는 전투가 필요하다는 쪽도, 그만둬야 한다는 쪽에도 모두 나름의 필요성과 논리가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어느 편이 더 논리의 빈틈을 파고 들어 명분을 확보해내느냐에 달린 것이다. 북방을 개척하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을 민생에 투자하자는 의견을 주장하려면, 명국의 심기를 건드린다는 외교적 상황에서부터 전쟁을 치르는 비용과 인력 문제 현황까지 일일이 꿰고 나서 반박해야 한다. 그러면 또 북방 개척을 찬성하는 쪽이 반대파의 갖가지 근거에도 불구하고 왜 북쪽으로의 영토 확장이 필요한지 연구해서 주장해야 한다. 세종의 거의 즉위하자마자 측근 정치라는 의혹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따로 만들지만, 최만리(이성민)가 훗날 정인지(이진우)에게 "반대해야 집현전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는 거다." 라고 다그치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반대하려면, 그리고 또 그 반대 의견을 반대하려면 더 많이 연구하고 더 정확하게 정세를 가늠하는 시야를 틔어야 한다. 누구나 반대를 말할 수 있고, 아무리 심하게 반대를 하더라도 반역죄로 죽지 않는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반대를 하려면 사시사철 집현전에 나와 밤샘도 마다않고 정책 연구에 몰두하는 세종을 앞서가려는 노력부터 해야한다. 그런데다가 막연한 신념이 아닌 현실성과 합리성을 잣대로 판단하다보니 어느 누구의 의견도 완전히 같아질 수 없으며, 사안에 따라 찬성파가 다시 반대파로 바뀌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최만리와 세자(후일 문종/ 강빛-이상엽)는 북방으로의 '전쟁'을 시작하려는 세종의 생각을 반대했지만, 가장 중차대한 문제인 훈민정음 창제를 두고는 세자가 찬성하고 최만리가 반대하면서 대립하게 된다. 물론 그 누구도 완벽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고, 백성 뿐만 아니라 양반의 기득권을 가진 대소신료들은 물론이고 '부왕과 다르게 정적을 내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가식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박은(박영지)에게 털어놓은 세종마저도 그런 이기심 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정치 사이클이 반복된다면,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저절로 모아질 수 있는 것이 국가를 경영해나가는 지혜(집현集賢)다.



이 아이러니한 정치 방식을 태종이 처음부터 달가워 할 리는 없다. 태종은 가뭄으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을 가만히 볼 수 없어 같이 단식하는 아들에게 "마르지 않는 눈물에 밥을 말아먹든 씻을 수 없는 노여움에 밥을 말아먹든 어떤 상황에서도 강건함을 잃어서는 아니 되느니, 군왕이 곧 조선이기 때문이다." 라는 냉엄한 진리를 가르치기도 하지만, 태조 이성계의 아들이자 측근으로서 조선을 건국한 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었던 사람이 바로 그다. 그런 '칼'의 정치가가 자신과 전혀 다른 군주의 길을 가고자 하는 셋째 아들(三子)의 세자 책봉을 승낙한 이유는 충녕대군이 의심할 바 없는 왕재라서가 아니라, 첫째 양녕대군이 나름대로 똑똑하고 야심도 가진 왕세자였지만 잇따른 그의 추문과 무모한 정치 행보를 감당할 수 없어서의 이유가 더 컸다. 가뜩이나 왕인 자신이 아닌 신하들이 충녕을 왕재로 지목하고 세자로 책봉되게끔 했다는 사실을 못마땅해하던 태종은, 외척에 휘둘리지 않게 하겠다는 명분으로 아들의 장인인 심온(최상훈)을 숙청하고 그의 처가를 반역죄로 몰락시킨다. 이런 태종의 막무가내식 행보를 두고 황희(김갑수)는 '정적을 제거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하지만 세종은 그저 '착하게' 정치하고자 한 것만이 아니라, 정적을 그대로 두고 반대를 인정하는 것이 정치판에 가져다주는 순기능을 간파하고 있었다.
집권 초기 세종의 가장 강력한 정적은 상왕임에도 군사권을 이양하지 않고, 처가를 숙청한 아버지 태종이었다. 태종은 일찌감치 대마도 정벌을 주장했고, 세종은 집현전에서 산출해 낸 전쟁의 기회비용을 근거로 들어 반대했다. 그런데 관료들이 대마도 전쟁 논란으로 이번에는 상왕이 정치적 수세에 몰렸다고 말하는 것도 잠시, 일본의 정세가 달라지고 최후의 수단으로서의 정벌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세종은 기꺼이 아버지와 협력한다. 세종은 강상인(정흥채)에게 내금위장으로서의 판단을 바란다며, 왕에 대한 충성심 이전에 관료로서의 전문적인 견해를 경청하려 했다. 태종에게는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받을 정도로 우직한 심복이었을 뿐인 강상인이 그 스스로의 판단으로 태종의 비합리성에 반기를 들자, 태종은 이를 '배신'으로 여기고 그를 죽였다. 이런 식으로 하나, 둘 그의 신하들이 칼에 스러져간 뒤에야 그는 세종의 신하들이 자신의 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아들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거의 마지막 남은 심복인 조말생(정동환)은 더이상 태종의 부탁을 받고 그를 죽일 수 있는 심복이 남지 않았을 때, 태종은 물론이고 세종의 정치 행보마저도 우습게 여긴다. 그 모든 것들을 겪어내고 난 뒤 비로소 태종은 손자(세자 향, 후일 문종)에게 "(아버지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면) 반대해야 한다. 그래도 너에 대한 아비의 사랑은 변함없을 거다." 라는 말을 남기면서 세종의 정치관을 인정하고 눈을 감는다.


(별자리를 함께 관찰하는 장영실과 세자 향 - 디씨인사이드 대왕세종갤러리 '와니♡'님 캡처) 



영악한 정치가들의 이타적인 정치


 
 

이러한 세종의 정치관에는 그저 얼마든지 반대해도 좋기만 하다는 것이 아니라, 두가지의 중요한 대전제가 깔려 있다. 그것은 능력이 되는 누구라도 나서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임해야하고, 모든 논쟁은 관료 자신의 이익이 아닌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최우선적으로 놓고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웬만큼 심란한 일에는 술이 아니라 집현전에 틀어박혀 서책을 넘길 정도로 온화한 성정을 가진 세종이 크게 화를 냈던 대표적인 사건 하나는 황희가 관직을 거부할 때였고, 다른 하나는 백성들이 비루한 것은 못 배워서가 아니라 원래 그렇게 생겨먹어서라는 반론이 튀어나온 순간이었다. 세종은 양녕대군의 폐세자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정계에 복귀하지 않으려는 황희에게 "반대하는 자보다 더 나쁜 것이 방관자니까!" 라면서 분노하고, 백성을 얕잡아보는 정창손(을 연기한 배우분의 성함을 아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세요!)에게는 "백성의 천품이 교화될 수 없다면 네놈이 정치를 왜 해!" 라면서 호통친다.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거나 정책의 부작용을 지적하지 않는 것, 아울러 정치에 있어 백성을 하늘로 보지 않는 것은 만백성의 어버이인 군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이기 전에, 세종이 정치에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꿈꿔 이룬 정치의 근본을 뒤엎기 때문이다.
이런 '반대의 정치학'은 자칫하면 시대에 거스르는 독단으로 비춰질 수 있던 세종의 혁신적인 정책들의 시행착오를 줄일 뿐더러, 정책의 수혜자인데도 정작 정치에는 참여할 수 없는 일반 백성들에게 귀결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노비 출신의 장영실(이천희)을 정식 관료로 기용하는 것은 신분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져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고, 그 누구도 그런 중요성을 넘어서는 합리적인 대안을 생각해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모한 정치 행보는 혁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모든 관료들은 자신의 정치적 행보가 곧 정책으로 확정되고 권력을 확보하기를 바라며, 반대파를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런 정치적 야심은 백성을 그렇게 귀히 여긴다는 세종도 딱히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결국에는 한 국가 내에서 관료들의 운명공동체가 되는 '백성(民)'을 제 1원칙으로 삼고 경쟁하게 된다면, 적어도 세종을 직접 대면하며 관직에 임하는 대소신료들에게서는 백성의 권익이 아닌 자신의 사리사욕을 먼저 챙기는 '대리인 문제'가 애시당초 불가능해진다. 오히려 백성을 위한 혁신보다 기득권 중심의 안정을 먼저 추구하는 보수파도 일단 청렴한 관료라는 사실은 그들의 반대가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와 다르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젊은 관료들이 자기를 '꼰대' 취급하는 것을 불만으로 여겼던 허조(김하균)는 하급 관원의 직무태만에 인사권자인 자기 자신에게 크게 노여워하고, 명국과의 간첩질(?)로까지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명국 동창과의 밀실 회동도 서슴치 않던 김문(김정학)은 조말생의 비리를 처음으로 폭로한 내부고발자였다. 그리고 조말생의 비리에 가장 질색을 한 사람은 다름아닌 최만리였다. 결국에는 '눈이 멀 정도의 백성에 대한 헌신'을 인정하고 최만리가 포기하는 것은, 그가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반대를 하더라도 세종과의 정치에서 요구되는 기본적인 분별력은 계속 지니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하지만 이렇게 절묘했던 세종의 정치는 결코 쉽지 않고, 시작 단계부터 순탄치 못했다. 왕권을 약화시키는 정치적 행보를 용납할 수 없었던 태종의 필살기(?)는 일찌감치 외척인 심온 집안을 숙청하는 것이었고, 세종이 그런 태종의 정치적 승부수에 휘말리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복수극을 이어가지 않는 것이다. 이 점은 누구보다도 피해자이자, 세종의 정치적 스승 중 하나였던 심온 스스로가 잘 알기에 소헌왕후(남지현-이윤지)에게 "앞만 보고 나가는 군왕과 국모가 되어야 한다." 고 다그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 세종의 행동을 뒤집어보자면 그건 곧 아버지나 다름없던 장인의 죽음을 외면하는 패륜이 된다. 괜히 원경왕후(최명길)가 "상천지 어느 가족이 이와 같을까. 끝없이 저울질 하고 의심해야 하는 것이 왕실의 명운....." 이라 탄식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나부터'가 아닌 '나까지'의 정치적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세종의 운명은 아내인 소헌왕후의 한을 넘어서, 죽어가는 정소공주(주다영)의 소원(외할머니, 즉 노비로 몰락했던 장모의 복권)을 들어주지도 못하게 됨으로써 '천벌'에 가까운 두 번의 죄책감을 평생 지고 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훗날, 장영실을 명국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세종은 장영실을 걷지도 못할 정도로 태형을 가하는 상상 이상의 잔인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는 천하의 세종대왕도 피해갈 수 없었던 운명적인 한계일 수도 있고, 세종의 정치력으로도 끝내 극복하지 못한 비극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무력을 우선시하지 않는 세종의 정치 그 자체에는 "저는 세상도, 또한 정치도 잘 모릅니다. 허나 저이와 같은 모진 차별과 박해 속에 있는 이들에게 깊은 마음을 주는 것, 그런 것이 정치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라고 하며 사람의 목숨과 마음 모두를 세종보다도 먼저 귀하게 여길 줄 알았던 소헌왕후가 있고, 왕이 될 가능성이 없었던 충녕대군 시절부터 곁을 지키던 윤회(이원종)와 이수의 열정이 있으며, 장영실을 노비가 아닌 훌륭한 기술자이자 아들과 다름없이 대하던 최해산(이대연)의 따뜻한 부성애가 있다. 그렇다면 궁은 아무리 살벌한 정치의 대결이 거듭되더라도, 칼바람의 피비린내가 아닌 사람 사는 정이 살갑게 숨쉬는 일터가 될 수 있다.
세종과 사람들의 이 모든 희노애락을 그려내는 데는 각본 못지 않게 영상의 힘이 컸다. <대왕세종>은 장영실이 만들어 내는 천문의기로 관측되는 밤하늘의 별자리와 과학기기, 영토 확장 지도 등을 깔끔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해 내고, 넓은 궁 안에서의 날카로운 처마와 스튜디오의 암전을 활용하여 등장인물들의 고뇌하는 순간들을 단 한 시퀀스도 소홀하게 넘기지 않았다. 웅장하면서도 현대적인 배경 음악 역시 이 정치 드라마가 '옛날 이야기'가 아닌 현재 속에서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데 몫을 다했다.
 

 

오래된 미래를 가로막은 지금 이순간



그런데 이 흥미진진한 정치 드라마는 내적인 한계보다는 외부의 문제로 인한 난관에 부딪혔다. 처음부터 정치드라마를 표방했던 <대왕세종>은 세종의 로맨스 상대(...!)인 신빈을 설정했다가, 배우 이정현이 도중 하차함으로써 정치 사극으로서의 집중력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사의 9시 뉴스와 동시간대에 방영하는 납득하기 힘든 시간대 변경과, 편안히 앉아 보는 게 아닌 장기간 집중해서 빠져들어야 할 긴장감을 우선시해야 하는 장르의 특성은 대다수의 시청자를 브라운관 앞으로 앉히지는 못했다. <대왕세종> 에서는 애주가로 소문난 윤회와, 독특한 말투를 가진 신장, 허조 등이 상대적으로 극의 무거운 느낌을 풀어주고는 했지만, 저마다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고 보는 군왕과 신료들의 이야기에서 <허준> 이나 <대장금>, <이산> 등에서 임현식이 맡았던 감초같은 코믹 캐릭터가 <대왕세종> 안에 녹아들기는 어렵다. 그래서 한 회 한 회마다 긴박감이 이어지지만, 불과 5회 정도만 연장 결정되어 86회로 끝나는 <대왕세종>의 전체적인 짜임새에는 군데군데 빈틈도 보였다.
세종을 중심에 두고 다양한 정치인들을 보게 된다면 맹사성(안대용)이나 김종서(이병욱), 최윤덕(선동혁)등의 '위인' 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지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극중에서의 조말생의 캐릭터는 대표적인 비리정치인이자 권모술수에 능하며, 동시에 국방 업무에 뛰어난 자질을 보이는 이중적인 캐릭터였다. 이런 인물을 다시 기용하는 것에 대한 세종의 딜레마는 그렇다 치더라도, 세종은 물론이고 말년의 태종까지 우습게 보던 조말생 스스로가 귀양갔다가 다시 관직에 복귀한 이후 어떤 생각으로 세종에 협조하면서 정치에 임하는지는 언급되지 못했다. 조말생 뿐만 아니라 허조 등, 한때나마 악역의 역할이 주어졌던 인물들의 정치 논쟁은 그 대사 한 줄 한 줄은 진중하되 정치가로서의 정체성은 잠깐의 순간에만 드러나고 만 것이다. 아울러 드라마 홈페이지에도 "음운학에 밝아 한글 창제에 큰 공을 세운다." 고 일찌감치 소개되었던 정의공주(이주현)가 막상 아역 이후에는 등장하지 못했던 점, 훈민정음 창제 직전 소헌왕후의 죽음과 월인천강지곡에 얽힌 사연 등 흥미로운 세종의 일생이 더 나오지 못했던 점 역시 아쉽게 다가온다.



제작진은 <대왕세종>의 기획의도가 그저 '성군'이며,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고, 딱히 정치적 갈등 없이 업적만 쌓이는 줄 알았던 태평성대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라고 밝혔었다. 그래서 1년 가까이 방영된 이 정치드라마에는 태평성대를 누리는 황홀함이나, 반대파를 정복하는 호쾌함 대신 강대국의 횡포를 인정해야 하는 답답함과 정치적 갈등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대왕세종>은 '반대'라는 것이 그저 비판을 받아들여 시행착오를 줄인다는 식의 갈등의 순기능도, 그저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히 인정되어야 하는 자유라는 주장을 넘어서 그 스스로가 이기적인 인간들의 정치를 이타적으로 순화시키는 원동력으로도 기능할 수 있다는 참신한 발상을 실현해냈다. 지금 이순간 뒤돌아 봐야 하는 것은 세종의 업적이 아닌 '과정'이라는 것, 그래서 그들이 우리의 '오래된 미래' 라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단 며칠, 몇 년만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온' 정치 천재 세종과, 그와 함께한 공직자들이 '백성을 위하여' 평생에 걸쳐 치열하게 이뤄낸 것임을 -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한 화두로 남기고 끝맺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訓民正音)' 를 일상적으로 쓰고 읽을 수 있지만 세상을 보는 식견도, 정치적 관심도 제각각인 '주권자' 국민들은 지금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이라는 상투적인 관용구와는 정반대로 진심을 다해 백성들의 삶을 위해 살고자 했던 '대왕', 세종은 하늘(ㅡ) 아래 땅(.), 그 위에 선 사람(ㅣ)을 보았다. 그러고보니 훈민정음 창제 후 562년이 지난 해, 서울 하늘 아래 나이와 성별과 직업과 종교, 심지어 국적마저 초월한 이들이 모두 모여 발을 딛고 걸었던 땅 - 그 길의 이름도 '세종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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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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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세종대왕의 혁신과 홍익인간

    Tracked from HEAL THE WORLD 2010/01/07 10:10  삭제

    나는 5만원권 발행에 반대한다! 우선 전자화폐의 시대에 새로운 고액권을 만드는 것 자체가 국가적 낭비. 또한 5만원권에 새겨질 인물이 신사임당이라는 점. 신사임당이 훌륭하지 않다는게 아니지만 만원권에 세종대왕님이 세계전 것을 생각하면 좀 격에 맞지 않는 느낌. 사실 세종대왕님을 빼고는 한국 화폐에 세겨진 인물과 그림은 솔직히 모두 불만. 왜 죄다 조선시대 인물이지? 이러니까 동북공정 어쩌구 말 나오지.. 이 나라 지도자들이 얼마나 역사 의식이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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