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이의 스케치북 (3)
다정(http://dajungspace.com)
"윤진이, 학교 옮겼어."
"예????!!!!!!!!"
이 동네는 중산층 가구가 대부분이며, 그만큼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어서 똑같은 평준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 동네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 는 속설이 근거있게 떠돌던 곳이었다. 그래서 선생님들도 시험문제를 낼 때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어렵게 내는 일이 많다. 내신이 너무 안 나오면 전학이라도 가야 예고에 갈 수 있다는 말에 난 그냥 여기서 성적 올릴 수 있는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미술학원의 권유대로 학교를 다른 구의 중학교로 옮긴 것이었다. 주소는 그대로 있고.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얼마나 절박하면 학교까지 옮길까 하는 생각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윤진아. 너 지금 무진장 부담되지?"
".....네."
"근데, 걱정하지마. 저번에 나랑 공부해서 성적 올랐잖아. 니가 옮긴 학교가 내 예상대로, 시험 문제를 쉽게 내는 지역이라고 치면, 그리고 니가 작년보다 공부를 더 체계적으로 열심히 하면, 성적 올라. 못해도 평균 80점은 넘을테니 걱정마라."
"예."
"그래, 언니도 열심히 도와줄게. 근데, 미술학원은 어떻게 되는거야?"
"이제 월화수목금토 다 가구요......"
"뭐? 공부는 언제 해???!!!!!!"
윤진이의 학원 시간표를 보는 순간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중 3이 되자 본격적으로 예고 입시에 대비해야 해서, 평일에는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토요일에는 오전과 오후 약 6시간 정도를 미술학원에서 보내야 한다. 입시반 진도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웬만한 때는 절대 결석을 할 수가 없다. 한 달 미술학원 입시반 수걍료가 60만원이란다. 보통 인문계 학생인 나도 그다지 학원을 많이 다닌 적 없는데, 두 번만 예체능 전공 했다간 집안 기둥 뿌리 뽑히겠다. 하지만 이런 걸 다 제쳐두고라도, 아이가 도무지 마음 놓고 쉴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게 제일 마음 아팠다. 하지만 이제 와서 미술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본인이 제일 잘하고 재미있어 하기 때문에. 윤진이 어머니도 잘 알고 계셨다.
"윤진이 공부 좀 잘 봐줘. 인제 뭐 발등에 불 떨어졌잖아."
"예, 다음 시험 잘 보라고 제가 열심히 가르쳐줄게요. 격정마세요."
"그래. 안 그래도 저번에 성적 올라간 거 보고, 정말 고마웠거든. 조금만 더 봐줘. 애가 공부 안하거나 말 안듣고 그러면 때려도 돼."
"예?! 하하, 저 누구 때려가면서 가르친 적이 없어가지구요, 하고싶어도 몸이 안 따라줘요. 그리고 윤진이는 안 맞아도 알아서 잘 하는걸요 뭐."
이렇게 아주머니를 안심시켜 드리긴 했지만, 나야말로 성적 못 올려주면 애 인생이 달라질 지 모르겠다는 위기감(?) 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오래 붙들고 앉아서 가르치기에는 윤진이 미술학원 일정이 너무 셌다. 그나마 일반 학원도 미술학원 시간에 겹쳐서 모두 끊게되고, 시간 날 때 드문드문 다른 과목 과외를 하면서 보충하는 형편이었다. 공부 해서 성적을 올려야 하는데 정작 다른 학생에 비해 너무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오는 시간에라도 시험공부를 시켜야 되겠다 싶어서 시험 한 달 전 정도부터 암기과목 공부까지 같이 시켰다.내 전공과 관련있는 사회 교과에서는 따로 더 설명도 해 주고, 제대로 외웠나 확인하는 오럴 테스트도 하고, 문제집을 다 풀고 모르는 점을 짚고 넘어 갔는지, 최대한 봐줬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점수가 떨어질 리가 있어?"
"......(웃음)"
"자, 이제 그동안에 니가 시험지를 보며 느꼈던 답답함은 이제 끝이야. 내일 시험지 받아들면, 얼마나 니가 풀 수 있는 게 많아졌는지 알게될걸?"
아니나다를까. 거의 모든 과목에서 윤진이는 80점과 90점대를 넘나들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윤진아! 점수 평균 내봤어?"
"예."
"어느 정도야?"
"수행평가가 껴서 확실히는 아닌데요, 대략 평균 87에서 88 정도......."
"진짜????????? 잘했어, 정말 잘했어! 그래, 하니까 되지?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깐!!!!!"
윤진이가 없는 시간 쪼개가며 공부한 보람이 나온 것이다. 일주일에 6일 이상, 하루에 서너시간씩 미술학원에 매여있는 것을 감안하면, 윤진이의 성적은 보통 인문계 지망 아이의 평균 95점과도 그 성취도가 비슷하다고 여겨졌다. 윤진이 부모님과 나 역시 너무나 기뻤다. 본인의 보람은 오죽했을까. 물론 옮긴 학교의 시험문제 난이도가 약간 쉽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대폭 성적이 향상된 데는 본인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과외하러 가는 발걸음이 그 이후로 얼마나 신났는지 모른다. 안타까운 것은 기말고사때는 그나마 중간고사 전에 있던 시간도 미술학원에서 다 가져가는 바람에 (그렇게 애들을 잡아둔다고 하면, 당장 입시에는 합격할 지몰라도 예술적 감성이 길러지기는 하는걸까?) 공부할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는 거지만,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평균 84점 정도를 유지했다.
말수 없는 윤진이 성격에도 약간의 즐거운 변화는 있었다. 윤진이가 전학간 학교에서 사생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아온 걸 알았을때, 윤진이의 반응은 작년 이맘때와는 다르게 더 밝아져 있었다.
"우와! 너 전교 1등이야 그럼?"
"네."
"진짜? 후와~너 정말 그림 끝내주게 그리는구나. 근데......뭐야, 부상이 겨우 문화상품권 한 장이야?"
"아, 그 학교가 좀 가난해서리.....^^;;;"
"뜨아 ㅡ_ㅡ;; 그럼 전에 다니던 학교는 상품 잘 줬어?"
"거기도 비슷해요 ㅡ_ㅡ;;"
8월 말, 나는 1년여에 걸친 윤진이와의 과외를 마무리지었다. 그동안 올해 8월까지밖에 못한다고, 개인 사정을 말씀드려왔기 때문에 윤진이 부모님도 다 이해를 하셨다.
"언니가 그동안 몇 번 말한거 기억나지? 내가 봐주지 못하게 되는 때가 오더라도, 혼자 잘 해야 한다고."
"네."
"앞으로 예고 입시 거치고, 합격을 하든 안하든 많이 힘들어질거야. 사실 언니도 너 가르치면서, 내가 뻔히 다 겪고,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한 입시에 널 끌어들이는 것은 아닌가 마음이 좀....그랬거든. 근데, 니가 미술을 그만둘 생각이 아니라면 예고에 가는게 더 좋을거야. 꼭 대학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고, 아무래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데에 더 예술적 소양을 가진 선생님들이 많으실 거야. 언니도 외고다니면서, 의외로 좋은 선생님들을 너무너무 많이 만났거든. 너도 고등학교 가서, 힘들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잃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얻는 것도 많을 거야. 그걸 잊지마."
그리고 9월이 시작되었다. 나나 윤진이나 바쁘기는 피차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윤진이는 학교보다 미술학원에서 사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로 예고 입시에 매달려야했다. 내신성적이 3학년 1학기까지만 들어갔기 때문에 2학기에 중간고사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는 상황이 닥쳤는데, 사실 윤진이가 예고에 떨어지는 경우(?)까지 생각하는 나로서는 좀 불안하기도 했다.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합격하기를 바랄 수 밖에.
그 기간동안 잠시 집에서 나와 살며 학교에 다니던 나는 윤진이의 실기고사 일주일 전에 초콜렛 꾸러미와 편지를넣어서 윤진이네 집으로 소포를 부쳤다. 나도 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들어갔던 경험이 있는지라 시험장 들어갈때 떨리고 겁나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시험장에 일찍 들어가서 마음 잡고 정리할 것, 시간에 초조해하지 말고 연습한대로 차근차근 할 것, 졸리면언니가 넣어준 초콜렛 먹고 힘내라는 것^^등등을 말해줬다. 실기고사 하루 전에 윤진이 어머니께서 고마우셨는지 전화를 하셨다. 윤진이를 바꿔달라고 했는데, 너무 긴장을 많이 한 것 같다.
"박윤진! 긴장되지?"
"......네."
"근데, 사실 너 미술 정말 잘하잖아. 그리고 언니랑 같이 공부해서 성적도 확 올려봤지? 야 그거 사실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런 걸 해낸 니가 뭔들 못하겠니? 너는 떨면서 들어갈 지 몰라도 다른 애들은 거의 울면서 시험장 들어갈걸. 힘내^-^"
"네, 고맙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지금쯤 윤진이 합격 여부가 슬슬 나올 땐데.....하면서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나한테, 한통의 문자메세지가 왔다.
언니 저 붙었어요!!!!!!!!! >_<
그 순간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정류장에서 방방 뛰며 웬일이야~ 를 반복하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의아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추카추카! 그럴 줄 알았어 역시 윤진이 최고~!!!!!!!!!
라는 내 답장에, 윤진이는 이렇게 말했다.
네 ㅠ_ㅠ 지금까지 도와줘서 너무너무 고마워요
.....눈물이 핑 돌았다.
모르는 사람들이야 원래 미술은 잘 하는 애였다는데 예고 간게 뭐 그리 감격스럽냐고 반문할 지 모른다. 하지만 1년이 넘게 윤진이를 지켜보고 도와준 나로서는 달랐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 못한다는 이유로 어른들에게 타박 맞고 선생님들께 인정받지 못했던 윤진이, 그래서인지 '과외 선생님' 앞에서도 친구들에게처럼 밝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 윤진이, 내신 성적이 안 좋다고 급기야 전학까지 가서 낯선 학교에 적응해야 햇던 윤진이, 하지만 끝내 좌절하지 않고 밤 잠 덜어가며 노력한 윤진이, 학교 축제에 세븐이 오는데 데려가 주겠다는 언니의 회유(?)에도 미술학원 때문에 안된다고 거절하면서까지 연습에 몰두한 윤진이는 내게 너무나 과분한 제자였다. 그 전부터 나는 공부 잘하는 아이 보다는 공부 못하는 아이를 맡아서 성적을 확 올려주는 경험을 하고 싶다는, 나와 다른 대학생들에게서 찾기 힘든 하위권 학생의 모습을 보고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막상 만난 윤진이의 소극적인 모습에 나도 과외 그만둘까 하고 생각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윤진이가 결국 해낸 것이다. 물론 난 윤진이가 예고시험에 낙방했더라도 나름대로 격려를 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윤진이는 결정적인 순간에 '홈런' 을 쳤다. 그동안 마음속에 쌓여왔던 열등감도 멋지게 극복하게 된 것이다. 그런 윤진이가 나에게 한 '고맙다' 는 표현은, 내겐 더할 나위 없이 크나큰 감동이었다.
윤진이와의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점이 많다. 학습성취도가 떨어지는 학생을 지도하려면, 매나 훈계가 아니라 그 학생을 관찰하면서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파악하고, 학생 스스로 이겨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꼭 공부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인성지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윤진이를 마구 혼내거나, 숙제 안 해오면 일러바친다는 식으로 가르치려 들었다면 이 정도의 성적 향상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르치는 사람의 끈기가 필요하다는 것. 내가 중간에 과외를 그만두지 못한 이유 중에는 물론 어머니 친구집이라서 함부로 그만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는 점도 있지만, 이왕 맡은 거 안 되면 될 때까지 노력할거라는 오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윤진이를 맡은지 넉 달 정도까지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꾸준히 날 믿어주신 윤진이 부모님께도 깊이 감사를 드린다. 참, 특히 윤진이를 가르치고 난 뒤에는 체벌이 정말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전에도 "너도 맞아야만 마지못해 어른들 말 듣는 척 하는 그렇고 그런 애야? 아니잖아, 아닌 걸 아는데, 자꾸 이러면 어떡하니?" 라는 말만 했지 실제로 매를 든 적은 없었다. 이것은 내가 비교적 심한 체벌을 당하지 않고 자라왔기에 가능했다. 특히 나는 너무나 운이 좋게도, 고등학교때 담임선생님 세 분 모두는 제자들에게 매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내가 가장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바로 윤진이다. 별로 잘난 것도 없는 언니의 잔소리를 꾹 참고 들어준 것이 고맙고,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생활이 힘든데도 잘 견디고 목표를 이뤄낸 점에서도내가 윤진이에게 배울 점이 생긴 것이다. 윤진이를 가르치는 과정이 결국 우리나라 입시 위주 풍토에 일조한 것이라고 비난을 해도 할 말은 없다. 나도 그 점에서는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윤진이를 통해 내가, 그리고 감히 말하자면 다른 선생님들이 어떻게 학생을 대해야 하는지 깨닫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모범생이건 날라리이건, 모든 학생에게 매로 다스린다는 생각 대신 따스한 태도로대한다면 사제지간이 얼마나 사이좋아 지겠는가. 아무리 학교가 입시지옥으로 전락했다지만, 교사와 학생의 적대적 관계가 해소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이에 비해 내가 윤진이에게 해 준 것은 보잘것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 윤진이는 A예고 1학년에 다닌다. 과외를 그만두고 나서도 꼬박꼬박 시험점수는 체크하고, 조언해주곤 했는데 고등학교 들어가서 치른첫 시험 결과는 어떤가 물어봤다.평균 85점은 되는 것 같다니, 다행이다.
"학교 다니는 건 재밌어? 힘들지."
"아, 하지만 일반고등학교 간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다행이다. 참 너네 학교에 막 애들 패고 이런.....미친 * 같은 선생님은 없어?"
"예, 없는데요......"
"없는데 뭐?"
'선배들이 쫌, 무서워요."
"왜?"
"선배한테 인사도 잘 해야 되구요, 미술실 청소 안 했다고 막 불려가고 기합(!)도 받고 그러거든요."
"........하여튼 애들이 이런 거나 배워가지고 ㅡ_ㅡ;; 그런 거 싫겠다. 근데......사실 언니도 고등학교까지 나오는 동안, 우리나라 학교들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지 못하다고 많이 느꼈어. 너 가르칠때도 그래서 죄책감도 들었고. 근데 한 사람 힘만으로는 그런 현실을 바꿀수가 없더라고.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더라."
"......"
"그 대신, 니가 옳고 그른 건 확실히 판단을 했으면 좋겠어. 선배들이 쓸데없이 너네한테 군기잡는거, 나쁜거잖아. 지들이 뭔데. 넌 그럼 걔네한테 대들지는 말고 - 괜히 맞는다 - , 대신 니가 나중에 후배들한테 잘해줘. 선배들이 가오잡는 그런 나쁜 전통(?)을, 너희 학년이 깨야지 어떡하겠어. 그지? 학교 생활 잘 하고 있다니 다행이네. 몸 건강하고......."
윤진이가 예고를 갔다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날 미술을 그만 둘 수도 있고, 학교가 싫다며 자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안되는 줄 알았는데 해냈다는 그 경험이 윤진이의 앞날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윤진이가 정말,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지난 1년동안 윤진이가 만들어낸 드라마를 생각하면, 희망이 가득하다. 윤진이의 스케치북에, 그 아이의 마음속에 날마다 푸른 꿈이 그려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윤진이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남긴다. 선생님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였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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