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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이의 스케치북 (2)
다정(http://dajungspace.com)
"숙제 한 번 안 해 온 것 같고 왜 이러나 생각하지 말고,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
"너 나 처음에 만나고서 뭐라고 했지? 성적 올리고 싶다고 했잖아. 근데 이렇게 숙제 하기 싫다고 안 하고, 시간만 때우면서 넘어가려고 하고...... 지금 장난하냐?"
"....... (하기 싫어서 안 한 거 아니냐는 말에 가만히 있었다. 정말이었나보다.)"
"그래, 그동안 내가 숙제를 계속 내 준거 인정해. 하지만 니가 시간이 없어서 못 할 정도로 어렵거나 많은 분량이 절대 아니었어. 알지? 숙제하라는 건, 배운 걸 그 때 그 때 제대로 복습해서 평소에 공부하는 습관 익히게 하려고 그런 거였어. 쓸데 없는 삽질하는 게 아니라 니가 공부하도록 하는 거란 거 알잖아. 설령 숙제 하기 싫었다고 치자. 그러면 니가 먼저 '언니 오늘은 숙제 안 내주면 안돼요? 쉬고 싶어요' 라고 지난 시간에 말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그런거 일방적으로 무시할 정도로 독한 선생 아니야."
"......."
"너 지금 상황을 봐봐. 성적 못 올리면 예고는 커녕 인문계 고등학교도 가기 간당 간당한 처지 아니야? 나도 이 동네에서 중학교 나와서 여기 분위기 어떤지 잘 알아. 내신 따기 힘들고 아무리 노는 애들이라도 눈치 보여서 교과서는 갖고다녀. 그런데 넌 공부 습관을 못 잡았잖아. 더 늦기 전에 내가 도와준다고 했잖아. 언니 말대로 하라고 했지, 근데 이게 뭐니. 너 방에 있는 만화책 안 보이게 치운 것도 아니고. 공부하다가 지루해지면 못 참고 몰래 만화책 보다가 엄마 들어오시기 직전에 다시 덮고 그러고, 맞지?"
"......(공부하다가 몰래 만화책 보는 것도 진짜였던 것 같다. 대부분 학생들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나도 그랬던 적 있었고.)"
"만화가 나쁜게 아니라, 할 때는 하고 놀때는 놀아야지. 넌 지금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야. 공부는 못하는데 그렇다고 날라리는 또 아니잖아. 본인이 절박한 생태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주위에서 공부하라고 잔소리 해도 성적 안 올라. 넌 지금 남의 잔소리가 없어도 심각한 상황이야. 어쩔려고 그러니. 이래 갖고, 그 성적 가지고 A예고 가겠어? 평균이 60점대 초반인 애가? 미술만 잘 하면 뭐해, 내신 전형에서 탈락될 수 있는데. 학원만 많이 다니고 과외는 하지. 드는 돈이 얼만데, 아깝지 않아? 나한테 막 도와달라고 하고, 물어보고, 빼갈 수 있는 거 최대한 가져가. 넌 지금 너무, 수동적이야."
"......"
"난 니 성적을 정말 올리고 싶어. 쓸데없이 공부 잘하는 애들한테 패배의식 느끼지 말았으면 좋겠어. 애들 머리 다 거기서 거기야. 넌 공부하는 요령만 익히고 행동으로 옮기면 되는거야. 노력하면 오르는 게 성적이야. 물론 전교 등수로 세는 애들에게는 똑같이 공부해도 더 점수 잘 맞는, 시험에서의 감각이 있기는 해. 하지만 그런거 몰라도, 열심히만 하면 반에서 10등은 들 수 있어."
윤진이는 반항도 안 하고, 그렇다고 울지도 않고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 말을 하고 나서 벽시계를 보니, 내가와서 숙제검사를 하고 혼내기 시작한지 무려 55분(정말!)이나 지나있었다. (나는 수업 중에 자주 시간을 체크한다) 세상에, 아무리 내 말발이 세다지만 그 55분동안 무슨 잔소리를 그렇게 쉬지도 않고 한 건지. 그 긴 말들을 꾹 참고 들은 윤진이도 참 대단했다. 이건 누가 이기나 보자고 벼르는 것도 아니고, 참......
"숙제 안 해오면 진도 못나간다고 했었지? 오늘 수업 못 하겠다. 시간도 너무 지났어."
"......"
"너희 엄마께 말씀 안 드릴테니까(그 때 마침 부모님이 집에 안 계셨다), 다음 시간까지 숙제 해와. 다음에도 이러면 진짜 못 가르친단 말이야. 안 이를 테니까 기 죽지 말고. 알았어?'
".......네."
"나 간다."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과감히(?) 수업을 접고 나왔다.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 윤진이는 지금 혼자 방안에서 울지도 모른다. 세상에 잔소리 듣고 기분 좋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나 역시 우울해졌다. 내가 뭐가 잘난 게 그렇게 많다고 아이를 혼낼 수 있다는 말인가. 다 잘되라고 하는 말이었는데도 상처 받는거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한 말 또 해서 짜증만 더 나게 한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막내로 자란 지라 집안에서 야단은 맞아도 누굴 혼내보지 못한 덕택에 아랫 사람(?)에게 화 내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었고 그 때문에 윤진이에게 하는 말도 소리를 질러가며 욕하고 짜증을 내는게 아니라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게 더 짜증난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리고 '너 아이큐 두자리냐? 머리가 딸리면 노력이라도 해야 될 거 아니야' 라는 식의 말은 꺼내지 않았다는 거였다. 이건 공부 못하는 아이는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일 뿐이고 사람 지능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는 윤진이를 좌절시키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온 것이니까.
하지만 반성해야 할 점도 있었다. 나는 윤진이에게 공부하라고 할 때 넌 성적 올리지 못하면 미술이고 뭐고 끝이다, 라고만 할 줄 알았지 공부에 재미를 느끼게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대충 할 말이야 생각해 봤지만 오늘 혼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 번으로 알아들을 말을 두번 세번 반복한 부분이 있던거 같았다. 학생에게 시간을 들여 충고하거나 벌을 내릴때는 그 어느때보다도 가르치는 사람이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어야 안다는 것을 깨달았다. 꼬투리 잡혔다고 일단 화부터 내는 순간, 그건 가르치는 게 아니라 화풀이가 되어버릴 테니까.
그런데도, 이런 내 부족한 모습이 더욱 부끄럽게도, 윤진이는 착했다. 그 다음주에 찾아가니, 아주머니가 날 보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번에 숙제 안 해왔다고 혼냈다면서?"
"예? (말 안 할 줄 알았는데???)"
"에이그, 혼나야지 뭐. 언니가 지 잘되라고 그러는건데."
엄마에게 먼저 숙제를 안 했다고 혼났다, 그래서 진도를 못 맞추는 바람에 수업을 못했다고 말을 한 것이다. 내가 비밀로 하겠다고, 또 이래놓고 몰래 말할 정도로 치사하게 사는 인간 아니니 걱정말라고 했는데도 말이다. 아주머니는 내게 오히려 윤진이를 잘 봐달라고 하셨다. 늘 내가 오면 현관에 나와서 '안녕하세요' 라고 했던 윤진이도 머쓱했나보다.
"저번에 혼나서 짜증났지. 괜히 잔소리만 한시간 동안 듣고. 근데 너도 대단하더라? 그걸 참고 다 듣게"
".......(약간 웃음)"
"그래, 그런 참을성 가지고 뭘 못하겠어? 이제 잘 해보는 거다 다시. 하면 다 돼. 오케이?"
"네."
다시, 시작이다.
그 이후로도 우리의 수업이 그다지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말수 없는 윤진이에게 나는 본의 아니게 주입식 교육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는데, 내 나름대로는 지루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교과 진도보다는 선생님의 첫사랑 내지는 드라마 얘기하는 걸 더 좋아하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나도 설명하다가 요즘 남자 중학생들이 그렇게나 장나라를 좋아한단 말이야? 라고 물어보기도 하고, 내가 입시를 겪으면서 느낀 점들을 툭툭 말해주기도 했다. 당장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더라도 몇 년 뒤에 '아, 선생님이 이래서 그런 말씀을 해 주신 거구나' 하고 퍼뜩 깨닫는 경우를 누구나 겪어본 적 있을 것이다. 윤진이에게 미욱하나마 내가 그런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윤진이는 내게 직접 의사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나와 과외를 하는 걸 보니 괜찮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차츰 나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2학기 중간고사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더이상 떨어지면 안되는 성적이, 그만 평균 59점(!)으로 곤두박질 친 것이다.
보통 남녀공학에서 남여학생의 성적을 구분해보면, 몇몇 이과과목을 제외한 대부분의 과목 평균 성적이 여학생들이 몇 점씩 높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하위권 여학생의 경우, 내신 산정에 있어서 더 불리해지는 경우가 많다. 딱 윤진이가 그런 경우였다. 윤진이가 지망하는 A예고는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실기 한 방으로 입학점수를 뒤집을 수 있는 그런 학교가 아니었다. 그 학교는 신입생을 뽑을 때 중학교 때 내신성적을 반영 하는데 2학년 성적이 40%, 3학년 성적이 60% 비율이었다. 이미 2학년 된지 중간이나 지났고, 나름대로 내가 성적 올려주겠다고 장담을 했는데 이렇게 일이 꼬인 것이다. 부모님 입장에서 땀흘려 번 돈으로 과외비를 쓰는데, 그에 맞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나는 윤진이 어머니께 너무나 죄송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참 감사하게도, 그동안 내가 공부 방법을 가르쳐왔다는 것을 믿어주셨다. 나나 아주머니가 공감하는 이번 시험의 실패 원인은 첫째로, 미술학원과 종합반 수업을 듣느라 개인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고, 둘째로 윤진이가 그만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그나마 남은 시간에는 누워있느라 시험 공부를 하나도 못한 것이었다.
"아주머니, 저는 중고등학교때 최소한 시험 1주전이면 학원 안가고 암기과목 공부했구요, 학원 선생님들도 다 이해하셨어요. 윤진이 미술학원이라도 빠지면 안될까요? 저녁부터 밤까지 서너시간씩 시간 까먹는게 너무 아깝네요."
"근데 한 번이라도 빠지면 미술학원 원장 선생님이 전화하고 정말 난리나거든. 시험 기간이라고 빠지면 절대 안된다는 거야.입시반 수업이라는 게 몇 번 빠지고 해서 넘어갈 수 없다는거지."
"그러면 공부는 언제하나요? 미술학원 한 번 갔다오면, 피곤해서 공부도 못하고 그냥 자게 되는데. 왜 이젤 앞에 세워두고 등받이 없는 스툴에 앉아서 그림 그리다보면, 정말 피곤하잖아요."
"그래서 공부는 언제 하느냐 하고 물어보면 평소에 하라는거야. 시험기간에만 하는게 아니라 평소부터 시험공부를 하라는거지. 실제로 그렇게 해도 성적이 웬만큼들 나온다니까."
나 같은 경우는 평소에 수학과 영어를 중심으로 학교와 학원 진도를 병행해서 복습하되, 시험 한 달 전 정도부터 국어와 과학을 공부하고 20일 정도 전부터 다른 암기과목들을 공부하고는 했다. 이건 나뿐 아니라 대부분 내 주위 우등생들의 방법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윤진이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아유, 그래서 학원도 지금 다 끊고, 학원 선생님이 전화해서 더 맡겨달라 그러는 거 안되겠다고 했어. 돈 낭비밖에 안 되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학원이라도 다른 데로 옮겨보시게요?"
"응, 일단 수학이랑 과학이라도 그렇게 하려고 해."
이렇게 말하는 동안 윤진이는 점점 입시 지옥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거라는 죄책감(?)은 늘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성적을 올려야 했다. 물론 윤진이는 학문이 아닌 예술쪽을 지망하지만, 학생은 공부 잘하는 게 최고라는 이 거대한 사회의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그저 무력한 '열등생' 으로 전락해버릴 지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더럭났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부터 들었던 공부 못한다는 소리, 부모님의 걱정, 어린 나이부터 들었을 우등생들에 대한 열등감 내지는 패배감에서 윤진이를 구출해주고 싶었다. 세상은 학생을 공부 잘하는 아이와 공부 못하는 아이, 모범생 아니면 날라리라는 이분법으로 나눠버리지만 그 안에 얼마나 다양한 개성이 숨쉬고 있는가? 다행히 윤진이는 일단 자기가 잘 하는 분야를 일찍 알아서 그 길로 가는 결심을 했지만, 자기 자신의 소질을 찾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대한민국의 중고등학생은 또 얼마나 많은가. 윤진이가 이런 사회를 피할 수 없다면, 1등까지는 아니더라도 성적을 확 올려서 자신감을 주게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어? 나도 해보니 성적이 오르네?' 라고 기뻐하는 경험을 대한민국에 사는 하위권 성적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가져봐야 하지 않을까. 훗날 공부에서 손을 떼고 그림만 그리더라도 '내가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한게 아니라, 미술을 선택하느라 상대적으로 공부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라는 자신감을 심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윤진이의 사례는 교육학에서 말하는'학습된 무기력' 에 해당한다. 계속 성적이 안 좋다 보니 주위에서도 좋지 않게 평가를 내리고, 스스로도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다 보니 '나는 해도 안 되는구나. 어차피 안 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점점 뿌리깊게 박혀서 무기력해지고, 그나마 하던 노력도 점점 하지 않은 채 체념해간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습자를 탈출시키기 위해서는 큰 성과를 경험하게 해서 나도 할 수 있다, 는 것을 깨우쳐줘야 한다고 교육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소극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공부해, 라고 말만 했지 혹여 지나친 간섭이 될까봐 지켜보기만 했던 내 방식을 대폭 뜯어고치기로 했다.
"윤진아."
"......."
" 성적 더 떨어졌다고 기 죽지 말구.뭐 이젠 더 떨어질 것도 없잖아? 올릴 일만 남았다, 하하."
".......(피식 웃음)"
"그동안에는 언니가, 그냥 달력 갖다놓고 시험공부 스케줄만 짜주고 그랬잖아? 시험 일주일 전에는 너 공부시간 안 뺏는다고, 과외 빼먹고 대신 전화만 하고. 이젠 안 그럴거야. 너 공부하는 거 지켜볼거야. 아, 널 그렇다고 내내 감시하겠다는 건 아니구,시험 한 달 전 정도부터 내가너 시험공부 감독해줄게. 지금 영어 진도 나가는 게 문제가 아니겠다 싶어서. 좋지?"
".....네."
"니가 성적 올리고 싶어했고 최대한 노력했다는 거 알아. 언니가 지켜봤잖아. 근데 감기까지 걸리고 학원 다니느라 시간이 없었지. 지난 번에는 운이 나빴으니까, 이제 건강 관리 잘 하고 있어. 기말에는 언니 믿고 따라와라."
그래서 기말고사 한달 전부터, 학원에서 듣는 수업을 제외한 모든 과목을 어떻게 공부하는지 본격적으로 트레이닝 시키기 시작했다. 이러다보니 성적 하위권 학생들이 얼마나 어이 없이(?) 책을 보는지 알게 되었다. 국사 문제집을 보니, 분명히 교과서 내용을 다 알고 풀었다는데도 틀린 문제가 절반이 넘는다.
"윤진아, 너 암기과목 할때 어떻게 공부하니? 그냥 책 서너번 읽고 마는거야?"
"네."
"그게 아니지! 자, 그럼 내가 물어볼게. 흥선대원군이 철폐했다는 비변사가 뭐하는 기관이었지? 그리고 어떻게 정부를 개편한거지?"
"어, 그게......."
"니가 대답을 잘 못하는게 당연한게, 책을 몇 번만 읽으면 머리 속에 다 남을 거라고 크게 착각했기 때문이야. 자, 교과서 여기부터 여기까지 외워볼래? 30분 시간 줄게."
윤진이가 교과서를 보면서 연습장에 쓰기도 하고,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외우기 시작했다. 30분 후. 그 단락 내용을 다시 물어보니, 자신없어 하면서도 모두 옳게 대답한다. 잘했어!
"이거라니깐! 왜 암기 과목에서 많아야 한 두 개 밖에 안 틀리는 애들 있지? 다 이렇게 공부하는거야. 책을 덮어도 내용이 머릿속에서 그려지도록 외우는거야. 다른 과목까지 다 하려면 적어도 시험 20일 전부터 공부 시작하는 거고. 몰랐지, 걔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네. 그냥 저는 계속 밑줄 쳐가면서 몇 번 읽기만 했었어요."
"그럼 그렇지, 난 니가 왜 암기과목 성적이 안 나오나 했더니 원인이 이거였구나. 이제는 이렇게 하는거야. 물론 외우는게 귀찮고 지루하고 하기 싫을테지만, 그 자체가 나쁜 건 아니야. 우리나라 교육이 주입식 일변도여서 문제지, 지식을 머리 속에 담기 위해 외우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거잖아. 교과서가 모두 옳은 방향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니까, 교과서를 우습게 볼지언정 '지식' 은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되지 않겠어? 그지?"
"네."
"그리구, 왜 내가 그림 한 장 더 그릴 시간에 이런 쓸 데 없는 과목을 공부하는가 하고 너무 불평하지는 마. 물론 내가 너 나이때 생각해봐도 진짜 저걸 왜 배울까 싶고, 벼락치기로 외워서 공부해봤자 나중에 다시 까먹고 그러는 거 때문에 진짜 불만이었거든, 지금도 그렇고. 근데 뭐, 이런 사회나 국사, 과학.....등등 대부분 학문은 일단 알아둬야지 사회 나가서 사기 안 당하고 살 수 있어. 무식하면 진짜, 눈 뜨고도 코 베어간다니까. 뭐, 니가 그리고 미술을 할 거면, 이렇게 많이 알아둬야지 그게 미적 영감^^ 으로 표현되는 거 아니겠니? 예를 들어서.....국사를 공부하면 역사를 주제로 회화전시회를 준비할 수도 있고. 쓸데없는 공부가 아니야."
"......"
"생각해봐봐. 왜 애들이 요즘에, 더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하잖아? 공부 별로 안 해도 돈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고, 화려해 보이니까. 하지만 연예인이든, 가게에서 장사를 하든 다 사람은 배워야 돼. 연기자가 사극에 나오게 되면 그 시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국사를 알아야 하고, 또 장사하는 사람은 더 많이 더 좋은 물건을 팔기 위해 경제학을 배워야 하는 거지. 공부 안 하고 성공하는 사람 없다. 하기 싫다고 가만 있으면, 진짜 어디가서 사기맞기 딱이야 딱. 우리 나라 학교에서는 쓸데없는 걸 많이 가르치고 진짜 중요한 거는 빼먹고 가서 문젠데, 성적은 나빠도 괜찮지 사실. 하지만 아는 것 많고 생각 깊은, 똑부러지는 인간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해, 난,"
(......정말 제가 뻔뻔스런 잔소리를 많이했군요^^;;)
윤진이에게 '사람이 왜 공부해야 하는가' 를 말해주기 위해 고민한 끝에 얻어낸 결론이었다. 암기 위주, 입시 위주 교육에 몇몇 우등생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 보는 것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지만, 지식을 받아들이고 사고하는 태도는 삶에 있어서 어느 직업에나 꼭 필요하다. 그래야 더 생각이 깊어질 수 있고, 삶의 지혜가 생긴다는 게 내 신념이다. 비록 우리 사회가 아직은 지식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더라도. 또한, 학창 시절 줄곧 공부를 못한 경우에는 은연중에 책이나 신문, 논문등을 회피하게 될 지 모르는데 이럴 경우 민주시민으로서 사회에 참여할 가능성이 점점 적어지게 된다. 공부 잘해서 고위 관료나 상위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부터 비하받고, 또 자신 스스로도 난 무식하니까 뭐......골치 아픈 일은 알아서 하라지, 할 지 모른다. 정말 안된다.
윤진이도 내 말에 동감을 했는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점차 공부하는 습관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윤진이 수준에서 좀 어려운 영어 독해집을 가지고 수업을 했었는데, 어려워서 문장을 해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도 일단 꼭 시도는 해 봤다. 그리고 나는 윤진이가 아무리 문제를 많이 틀려도 '좀 아쉽다' 내지는 '더 세세히 했으면 다 풀 수 있었을텐데' 라는 식으로만 말했지 전혀 혼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잘 한 게 있으면 마구마구, 반복해서 칭찬을 해 줬다. 넌 지금 점점 나아져가고 있다, 고 아이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했고 실제로 나도 그렇게 믿었으니까.
(이것을 교육학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기대 효과) 라고 하는데, 교사가 학생의 실력이 향상될 거라는 믿음이나 기대를 가지고 수업을 하면, '얘는 가르쳐도 구제불능이야' 라는 생각을 가지고 가르치는 경우와 비교해서 실력 향상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과외를 할 당시는 이 이론을 몰랐지만, 이 '자성적 예언' 의 효과를 나도 체험했다.)
이렇게 시험공부까지 시키다보니, 기쁘게도, 다음 기말고사에서 윤진이는 평균 9점을 올렸다. 68점이라는 숫자가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도 하니까 된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부모님들도 많이 좋아하셨다. 그래, 다음 번에는 평균 75점, 80점 넘는거다!
그런데, 이듬해 3월 초. 개강때문에 많이 바빠서 윤진이에게 전화를 많이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른채윤진이에게 갔을때, 아주머니가 들어오셔서 물었다.
"(윤진이에게) 언니한테 말 했어?"
"아니, 아직......"
"무슨 일이신데요?"
아주머니가 잠깐 머뭇거린 뒤 말씀하신 건 내겐 정말 충격이었다.
"윤진이, 학교 옮겼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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