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할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다정

http://blog.naver.com/dajungspace

가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순수함' 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때 어른들이 바라는 아이의 '순수함' 이란, 해맑게 웃으며 '아빠 힘내세요~' 를 노래하면서도 어른의 사고방식에 한순간 짜릿함을 가져다 줄위트가 있는, 제법 고난도의 수준이다. ('전파견문록' 을 떠올려보시라.)
그렇게 생각해보면 난 진짜로 삭막한 유치원생이었다. 머리털 나고 나서 한 번도 진지하게 '산타할
아버지가 정말 있다' 고 믿은 적이 없었으니까. 일찌감치 학교에 적응시키려는 부모님의 교육관에 힘입어 난 유치원을 2년 다녔는데,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준 적은 딱 한 번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일곱살 때 다닌 유치원은 절에 딸린 불교계 유치원이었기에 성탄절 행사를 치르지 않았고 역시 집이 불교라서 그런지 크리스마스는 내가 별로 감사해할 것도 즐거워할 것도 없는 그냥 휴일 중 하나였다(지금도 마찬가지다).이러다보니 동화책속의 산타는 그냥 '동화 속 주인공' 뿐이었던 게 당연했고,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던 그 여섯살의 겨울에서 엄마의 말은 그저의아했을 수 밖에.

"성탄절에 뭐 갖고 싶어? 산타할아버지가 유치원에 오신대."
"(산타는 책속에서만 살던데?) 산타할아버지가 실제로 있어? 없잖아?"
"(얘가 안 속으려고 그러네?) 그럼~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주신댔어. 뭐 갖고 싶어?"


내가 갖고 싶어했던 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당시 TV광고에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여 나를 비롯한 전국의 여자아이들을 홀렸던 인형놀이 화장대였다. 갖고 놀기에 제법 큰 편이던 그 화장대는(그냥 '미미 화장대' 라고 하겠음. 정확한 상표 기억 안 남) 내가 떼를 쓰며 사달랠 수 있는 장난감 치고는 꽤 비싼 편이었다. 게다가 우리 아파트 아랫집에는 나와 친한 유치원친구 지영이가 살았는데, 요즘 들어 '나 산타할아버지한테 미미 화장대 사달랠꺼다~ 안되면 엄마 아빠한테 졸라봐야지~' 라고 노래를 부르며 다녔던지라 "난 너랑 똑같은 거 안 가진다" 는 앙큼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 엄마한테 다른 하나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미미화장대를 달라고는 안 하고.


"부츠."

"무슨 부츠?"

"저번에 엄마랑 같이 나가서 본 하얀색 부츠 갖고 싶어.(요즘의 어그 부츠와 유사한 스타일이었음^-^)"

"(오~얘가 그걸 기억을 하네? 사달라고 그러더만....) 그래 정말이지? 알았어~"


그런데 다음날. 부엌에서 칼질하다 말고 엄마는 또 물어보는 게 아닌가.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한테 뭐 받고 싶어?"

"(어제 물어본 걸 또 물어보다니 우리 엄마 이상해!)하얀색 부츠 있잖아. 엄마 어제 물어본거 또 물어본다."

"(얘가 인형같은 거 사달라 그럴 줄 알았는데 맘이 안 변했네?)아~ 그래. 혹시 딴 거 갖고싶은 거 아닌가 해서. 알았어~"

회심의 미소를 짓던 엄마의 얼굴을 난 당연히 보지 못했고, 며칠 후 크리스마스 이브.

성탄절이라고 해서 머리도 예쁘게 빗고 엄마와 함께 유치원으로 갔다. 그 전부터 산타가 유치원에 온다는 소리에 많은 아이들이 들떴었는데, 난 산타를 안 믿었으니 그 날 진짜 산타는 아니지만 그냥 선물을 줄 누군가가 오나보다 하고만 생각했었다. 그냥 선물을 공짜로 받는다니까 좋아서 앉아있는데, 드디어 선생님이 활짝 웃으며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자~ 우리 친구들, 다함께 산타할아버지 불러볼까요? 하나~ 둘~ 셋!"

"산 타 할 아 버 지 이 이 이 ~"

유치원이 들썩거릴 정도로 아이들이 외치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폭발하는 환호에 익숙한 듯 천천히 손을 흔드는, 빨간 옷에 흰 수염. 그는 진짜로 산타인 것이었다! 세상에 이럴수가.....정말 산타가 있던 거였구나.......라고 착각할 뻔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외국에 있다는 산타가 우리 유치원에 어떻게 와. 말두 안되지. 그냥 저 할아버진 산타 친구나 뭐 그런 사람이겠지~그래도 어쨌건 무진장 설레였다. 왜? 선물을 준다니까!


친구들 하나 하나 이름을 부르며 선물을나눠주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내 차례가 되었다. 산타는 내 이름을 부르고 나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올해 몇 살?"

"(어른들은아이들을 보면 나이밖에 안 궁금한가?)여섯살이요."

"할아버지가 착한 아이들한테만 선물을 주는데~ 엄마 아빠 말씀 잘 들었어요?"

"(엄마 아빠 말 잘들으란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말을 안 듣고 싶어도 안 들을 수가 없어요. 근데 수염 진짜같아....진짜 할아버지는 맞겠지?) 네~"

"내년에도 착한 일 많이 하고 밥도 잘 먹고~"

"(내가 밥 잘 안 먹는거 어떻게 알았지? 암튼 선물이나 줘요!) 네~"

"아이 착하다~ 자 그럼 할아버지가 선물을 줄게요!"


라고 하면서 그가 빨간색 자루에서 상자를 꺼내 나에게 주었다. 드디어 받았다~ 하고 입이 찢어져라 좋아했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선물이 꼭 내가 갖고 싶은 그대로 받는 것은 아니라고 들었기 때문에 그게틀림없이 신발일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물 상자는 뭔지 짐작을 못 할 정도로 내가 안고 가기엔 너무 컸고 흔들어보니 뭔가 덜컹덜컹하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기분이 마냥 좋았다. 왜냐면, 친구들중에 내 선물상자가 제일루 컸거든!
아이들은 앞다투어 선물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선생님은 집에 가서 풀어보는 거라며 말렸다. 그래서
나도 굉장히 궁금했지만 꾹 참고 집에까지 선물을 모셔왔다. 그런데 포장지를 뜯은 순간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엄마 이것 봐! 미미화장대야~"

"응? 오오(얼떨떨함) 그래~ 좋겠네 우리 딸~"

난 두 번째로 갖고 싶은 걸 달라고 했는데 글쎄 산타할아버지가 제일 첫번째로 갖고 싶어하던 그 미미화장대를 준 것이었다. 아무한테도 얘기 한 했는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지? 6년동안 살아오면서 그렇게 환희에 차 본 적이 없었다. 그래 내가 평소에 엄마 아빠 말대로 인사도 잘 하고 착하게 살았던거야~ 유치원에서도 선생님들이 날 얼마나 이뻐했는데! 비록 가짜라지만 산타가 날 알아주다니! 역시 난 특별했어 우하하하!!!!

그래서 그크리스마스 이브는 내게 너무나 행복했었다. 솔직히 하는 것도 없이 선물을 받는데 그것도 이렇게 딱 갖고싶은(게다가 좀 비싼) 걸 받았다는 걸로 난 뿌듯했고 친구들에게 빨리 자랑하고 싶었다.


이틀 후 지영이네 집에 갔다. 그런데 신발장 선반 위에 내가 못 보던 지영이의 새 신발이 있었다.

"어? 이거 내가 엄마한테 사달라고 했던 부츠다."

"응....산타할아버지가 줬어."

"난 미미화장대 받았는데?"

"정말? 내가 분명히 산타할아버지한테 미미화장대 달라고 했는데!"

"아~산타할아버지가 꼭 자기가 갖고 싶은 걸 주는 건 아닌가보다~ (그러길래 너도 나처럼 엄마 아빠 말을 잘 듣고 착한 일을 했어야지~ 그럼 말 안해도 산타할아버지가 척 갖다준다니깐.)"


그 후로 대전으로 이사가고, 다시 서울로 오면서 그 때의 추억은 거의 다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유치원의 산타가 사실 '알바' 라는 것과, 그 선물도 부모님 돈으로 사서 주는 걸 모두 안 뒤에야 생각이 났다. (난 유치원에서 그냥 주는 건 줄 알았다. 그냥 '참 잘했어요' 라고 찍는 그림 도장처럼.)


"엄마! 그 때 선물 바뀐거였지, 나랑 걔랑?"

"응? 아~ 그래. 어쩐지 니가 받은 게 좀 이상하다 했어."

"유치원에서 무슨 연락 없었어 그 후로?"

"아무 말도 없었는데? 그걸 어떻게 도로 달라 그러니. 산타가 실수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난 그 때 정말로 흰 색 부츠 갖고 싶긴 했는데. 지영이만 안 됐다!"

아마 유치원 선생님들은 지영이 부모님한테 거센 항의를 받았을 거다^^;; 그나저나 그 산타가 아르바이트비는 제대로 챙겼을라나 모르겠다. 분장도 괜찮고 연기력은 출중했으나(난 그가 산타는 아니더라도 실제로 우리 할아버지 또래인 줄 알았다. 나의 영악함은 2% 부족했던 듯.....) 산타의 임무는 역시 기초부터다. 받을 사람한테 제대로 선물 갖다주기^-^

이 글에 대한 저작권은 다정에게 있으며, 네이버 약관과 저작권법에 의해 보장받습니다.

다른 사이트로 글을 퍼갈 때는반드시 출처와 글쓴이를 같이 가져가시고,

네이버 블로그나 카페로 스크랩 해갈때는 반드시 '스크랩 자취' 를 남겨주세요.

개인적인 용도(프리젠테이션,기사, 레포트 등)로 글의 일부나 전부를 인용할 시에는

미리 쪽지나 메일, 안부게시판으로 연락주세요.

무단 도용/ 표절/ 인용 등 사전 연락 없는이용으로 인한 저작권 침해에는법적 조치를 취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사원이다  (4) 2009/12/28
십대, 아이돌, 그리고 이십대 (2)  (0) 2009/03/23
십대, 아이돌, 그리고 이십대 (1)  (0) 2009/03/19
교실이 무너지던 날 (2)  (8) 2007/03/25
교실이 무너지던 날 (1)  (0) 2007/03/25
스승의 날을 기념하며  (2) 2005/05/13
산타할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2) 2004/12/30
아저씨, 집에 가세요  (2) 2004/11/04
윤진이의 스케치북 (3)  (0) 2004/05/20
윤진이의 스케치북 (2)  (0) 2004/05/17
윤진이의 스케치북 (1)  (0) 2004/05/16
Posted by dajung

트랙백 주소 :: http://dajungspace.com/trackback/29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wildblue BlogIcon 크레파스 2005/01/07 2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며칠전 딸아이가 그러더군요.
    어린이집에 온 산타는 가짜라고...
    검은색 머리카락이 보였다고...
    도대체 한비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걸까나???? ㅋㅋ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jungspace BlogIcon 다정 2005/01/08 1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죠? ^^:: 사실 유치원생 아이들도 산타가 없다거나, 가짜라는 걸 아는데 어른들이 산타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려하는 걸 그냥 받아들이는 거 같아요 :)